여행이야기/대만- 타이페이

대만 여행기 13 - 아픈 역사를 간직한 228평화공원

커피믹스 2012. 8. 25.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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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타이베이 박물관을 빠져나와 천천히 228 평화공원(허핑꽁위엔)으로 향하였다. 



얼마 가지 않아 야자수 같은 아열대 식물로 둘러싸인 연못 사이로  화려한 3층짜리 팔각형 모양의 중국식 정자가 눈에 띄었다.

 



연못 안에는 잉어가 살고 있었고 공원을 거니는 타이베이 시민들도 몇몇 보였다.

야자구 나무도 그렇고 건물 모양도 그렇고 한국이 아님을 다시금 실감하게 했다.




228 평화공원에서 특이한 비둘기를 보았다.

부리가 흰 비둘기였다.

부리가 희어서 더 눈에 띄는 비둘기였다.

여기 비둘기도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공원을 죽 돌아보니 공원이 꽤 넓고 평화로웠다.


육면체와 삼각형이 어우러져 기하학적인 기념비가  보였다.

228 사건을 기념하는 기념비였다.




기념비 가운데로 들어가보면 이런 징검다리가 있어 더 신비로운 느낌이다.




여기 손바닥 자국에 손을 올리면 가운데 물체에서 뭔가 튀어나올것 같다.




228 사건은 타이완 본토 출신인 타이완인(본성인)과 대륙에서 온 외성인 사이의 갈등이 요인이 되었다.

중국 본토의 남동 해안에서 160 킬로 떨어진 곳에 있는 타이완섬에는 17세기 중반부터 중국 대륙본토 한족이 이주해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45년 일본의 식민 지배가 끝난후부터는 국민당은 국부군을 타이완에 파견하는 등 인수

작업을 실시했고 1949년 중화민국을 세우기까지 대륙의 중국인들이 타이완으로 건너왔다.


타이완의 한족은 중국대륙에서 조기 이주해온 본성인과 1949년 전후에 장제스 국민당 정권과 함께 건너온 

외성인으로 나뉜다.본성인은 전 인구의 85%. 외성인은 13%를 차지하고 있다.


이둘의 갈등으로 일어난 사건이 228 사건이다.


외성인(外省人)에 비해 본성인(本省人)이 압도적으로 많았음에도 정부의 요직은 장제스를 위시한 외성인들이 차지했고, 

국민당정부가 본성인을 노골적으로 차별하는 정책을 펴자 주민들의 불만은 더욱 고조되었다. 국민당 정부는 계엄령을 통해

 타이완을 억압하기만 할 뿐 타이완의 민심에는 관심이 없었고, 타이완을 대륙에서의 전쟁을 위한 일종의 군사기지처럼 취급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타이완의 민심은 날로 흉흉해졌고 국민당 정부에 대한 실망과 불만이 팽배하였다.


1947년 2월 27일 밤, 타이베이 시 위엔환(圓環) 빌딩 안의 복도에서 정부의 전매 독점품인 담배를 노점에서 팔던 린쟝마이(林江邁)라는 여인이 허가받지 않고 담배노점을 했다는 이유로 담배주류공사의 직원과 경찰에 의해 단속되었다. 탈세를 빌미로 담배주류공사의 단속반원이 담배를 팔던 여인을 상대로 총신으로 머리를 때리는 등 심한 구타를 가하자, 주변에 있던 시민들이 경찰이 과격한 단속행태에 항의하면서 충돌이 빚어졌다. 이 과정에서 경찰이 항의하는 군중에게 발포하였고, 경찰이 쏜 총에 학생 한 명(陳文溪)이 사망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1947년 2월 28일, 사망 소식을 듣고 분노한 군중들이 발포공무원들에 대한 처벌을 주장하며 타이완에 들어와 있던 국민당 경찰과 장제스 휘하 군부대 본부를 에워싼 채 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타이완 경비총사령 천이(陳儀)는 시민들의 주장을 받아들이기는 커녕, 시위를 빌미로 타이베이시에 임시 계엄을 선포하였다.


 1947년 3월 8일부터 타이완에서는 대대적인 유혈진압이 시작되었다. 당일 새벽 두 시에 타이완 북부에 투입된 국민당 군 21사단은 곧바로 타이베이시에 진입해 시위대 진압을 개시하였다. 이로 인해 본성인 사상자가 속출하고 본성인 출신 지식인과 2.28 사건을 수습하고자 모였던 주민대표자들 상당수가 살해, 체포 또는 실종되었고 일부는 도망쳤다. 진압은 10여일간 대대적인 학살로 이어졌고, 본성인(本省人) 약 3만명이 살해, 실종된 것으로 추정된다.


 1988년 타이완 출신인 리덩후이가 총통에 취임하면서 본격적으로 언급되기 시작했다. 오랜 논란을 거쳐 1995년 리덩후이 총통이 국가차원에서 희생자 가족에게 사과하였고, 사건 발생 50주년인 1997년에는 중화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사죄하고 타이베이에 기념공원이 세워졌다. (by 위키백과)





대만도 같은 민족을 학살하는 아픈 과거가 있었다니 한국의 5.18 과 비슷한 끔찍한 아픔이었다.





지금은  이름그대로 아주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놀이터 기구중 돌로 만들어진 영구적인 미끄럼틀이 색달랐다.



우리는 228평화공원 자판기에서 살구음료와 오렌지캔을 빼먹었다.

 10 NTD (400원)에서 15 NTD 정도 한것 같다.


휴식을 취한 우리는 중화민국총통부를 보러 갈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