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전라북도

전북 완주 송광사 탐방

커피믹스 2014. 3. 18.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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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천 송광사는 우리나라 삼보사찰(불보,법보,승보) 중 하나인 승보사찰로서 유명하다. 

신라말 체징이 길상사라는 소규모 절을 지은것에서 비롯되어 보조국사 지눌에 의해 대찰로 중건된후 고려부터 

조선초까지 16명의 국사가 배출되었다.



전북 완주에도  송광사가 있다.

넓은 평지에 자리잡아 접귾하기가 좋았다.



절 입구에 거대한 고인돌이 있었는데 관리가 안되고 설명이 없어서 좀 아쉬웠다.


전북 완주 송광사는 신라 진평왕 5년(583)에 도의선사가 절터를 찾다가 영천수를 발견하고 터를 잡았다.

경문왕 7년(867)에 구산선문 중 도의국사의 가지산파 제3조인 보조국사 체징(804-880)에 의해 중창되었다.그 후 폐사가 

되어 주춧돌만 가시덤불 속에 남아 있던 것을 고려 보조국사가 이곳을 지나다 대성지임을 아시고 표시를 해두었고, 

순천 송광사를 개창한 후 제자들에게 본사를 복원,중창할 것을 부탁하여 수백년이 지난 조선 광해군 15년(1622)에 웅호,숭명,운정,득신,홍신 등 보조국사 제자들이 덕림스님을 중창주로 모시고 복원중창하게 되었다.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무사히 본국으로 돌아올 것을 기원하고 국난으로 돌아가신 일체 영가들의 왕생극락을 발원했던 곳이기도 하며 병자호란때 전주사고(왕조실록)을 지키기 위해 승군 700명이 머무른 곳이다.






일주문은 현재의 위치로부터 3km 남쪽 밖인 나드리(무주,진안방면 도로 입구)에 서있던 것을 1814년(순조14년) 조계교가 있던 곳에 옯겼다가 1944년 해방되기 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이 절은 원래 백련사라  불렸으며 800동의 당우와 600승려들이 살아 16방주(주지)가 있었다고 하니 규모가 아주 컸었다.

송광사의 입구에 세워 속세와 불계의 경계역할을 하는 상징물인 일주문은 조선시대에 지은것이다.









절을 들어가려면 항상 거쳐야 하는 곳 천왕문이다.





천왕전과 소조사천왕상

보물 제 1255호


송광사는 4천왕을 모신 곳을 천왕문을 하지 않고 천왕전으로 건축하여 이곳은 여닫는 문으로 되어있다.

사천왕은 갑옷을 입고 위엄이 충만한 무인상을 하고,동서남북의 사천국을 다스리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 초기부터

 나타나 조선시대에는 사찰입구에 사천왕문을 세워 모신다.서방 광목천왕상 왼쪽 머리끝 뒷면에는 조선인조27년(1649)에

 조성된 것을 알수있는 글이 있다.왼손에 얹어놓은 보탑 밑면에는 정조 10년(1786)에 새로이 보탑을 만들어 안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대웅전은 조선 인조 14년(1636)에 벽암국사가 짓고 철종 8년(1857)에 제봉선사가 한번의 공사를 더해 현재에 이르렀다

.대웅전에는 석가여래부처님을 주불로 모시고 우측에 아미타부처님 좌측에 약사 부처님을 각각 소조로 모셨다.전각안에

 모셔진 부처님으로서는 규모가 매우크다.대웅전 현판은 선조의 8번체 아들인 광해군 동생 의창군이 쓴것이다.인조  14년에 세운 송광사 개창비의 글도 의창군이 썼다.




종루는 종을 달아놓은 열십자형 2층 누각으로 송광사 도량을 장엄하는 가치가 크다,열십자로 된 종루 중앙칸에 범종을 모시고 동,남,서 3칸에 목어,운판,법고를 각각 모셨다,종루의 지붕은 중앙에서 모아지는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고 마루밑의 기둥은 모두 원형기둥을 세워놓았다.




불교국가였던 우리의 역사를 완주 송광사에서 한번 되짚어 보았던 시간이었다.


참조 : 송광사 홈페이지 http://www.songkwangsa.org/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56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