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경상남도

함양 학사루,이은대에서 김종직의 고민을 같이 해본다

커피믹스 2015. 11. 7.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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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여름 휴가를 시원한 무주구천동 계곡에서 더위를 식혔습니다.

집으로 내려오는 길에 함양계곡이 유명하다길래 함양 용추계곡에 잠시 들렀지요.참으로 물이 맑고 깨끗하더군요. 

함양에도 참 좋은 곳이 많구나 하고 담에 또 와야지 했던 곳입니다.

몇달 지나 가을바람이 부는 날, 이야기 탐방대는 함양초등학교에 모였습니다.



함양초등학교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눈에 들어오더군요.

마침 그 날은 한복입는날이라 애들이 한복을 입고 느티나무를 돌며 놀고 있었습니다.

참 편안하고 아름다운 풍경이었습니다. 시골학교가 부러워지는 모습이었지요.

공기좋은 곳에서 500년 넘은 느티나무 아래 뛰노는 초등생이 몇명이나 될런지요.

정서가 안정되서 어른이 되어도 어떤 어려움에도 잘 견뎌낼것만 같습니다.


함양초등학교


이 느티나무는 조선 전기 성리학자인 점필재 김종직이 함양현감으로 지낼 때 학사루 앞에 심은것으로 전해집니다.

학사루는 통일신라시대에 함양태수를 지냈던 최치원이 이 누각에 자주 올라 시를 지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숙종 18년 (1692)에 중건하고 1979년에 함양군청 앞으로 옮겨졌습니다.함양현감을 지내던 김종직은 어린 아들을 병으로

잃었는데 그 아들의 아호가 목아였습니다.김종직은 아들의 짧은 생을 달래려고 느티나무를 심었습니다.

이 느티나무는 심은지 500년이 넘고 높이는 22m 나무둘레는 7.25m 가 넘습니다. 




 

학사루는 고운 최치원선생이 통일신라시대에 함양 태수로 있을때 이 곳에 올라 시를 자주 지었기 때문에 학사루라는 이름이

지어졌다고 합니다.조선시대 관청의 객사자리인 현 함양초등학교 안에 있던 것을 1979년에 현재자리로 옮겼습니다.

이전 기록에 따르면 조선 숙종 18년(1692)에 다시 지었다고 전합니다.

원래는 학사루는 객사의 부속건물로 함양 읍성의 중심에 위치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학사루를 제외하고는 객사를 비롯한 다른 중요 건물이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관아에 딸린 건물로 옆에 객사가 있었고, 동쪽에는 제운루, 서쪽에는 청상루, 남쪽에는 망악루가 있었다고 전합니다.

이 누각은 정면 5칸,측면2칸의 비교적 큰 2층 팔작지붕 건물입니다.그렇게 화려한 건물은 아니지만 누의 아래와 위 지붕의 비례가 대단히 조화롭고 안정되어 있으므로 조선시대 관청에서 지은 누각 건축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이 건물과 관련된 일화가 있습니다. 김종직 (1431 -1492) 이 함양군수로 있을때 경상도 관찰사인 유자광이 학사루에 김종직을

만나러 옵니다. 유자광은 서얼출신으로 아첨,뇌물로 출세한 4대 간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김종직은 남이장군의 역모(남이의 옥사)의 배후를 유자광으로 보고 유자광을 혐오하고 경멸(輕蔑)하였습니다.

김종직은 비공식적인 유자광의 방문에 서얼 출신인 유자광을 피해 이은대로 잠시 피신합니다.

학사루에 온 유자광은 시를 하나 쓰고 가게되고 돌아온 김종직은 이곳에 걸려 있던 유자광( - 1512)이 쓴 시를 철거했습니다.

이것이 사적인 원한으로 발전하여 1498년 (연산군4년)에 일어난 무오사화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부분만 본다면 김종직도 시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나 봅니다.

그가 좀더 대인배다운 행동을 했다면 무오사화와 많은 선비들의 피비린내나는 싸움은 없었을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괜한 꼬장 같이 보이니 말입니다..아첨에 능한 간신 유자광이 싫었다는 걸 좀 치사하게 티를 내어버렸네요. 


이은대 / 충혼탑


김종직이 유자광을 피해 왔다는 이은대에 지금은 충혼탑이 있습니다.

일제시대에는 일본천황의 참배단을 만들어 군민에게 참배를 강요했다고 합니다.


이은대



 내가 김종직이었다면 유자광을 그냥 맞아주었을까?
속이 부글부글하지만 유자광을 만났을거 같습니다.
그리고 그날은 스트레스로 분위기를 험하게 만들고 밤에는 술한잔 마셨을 거 같네요.


김종직이 유자광을 피한건 나쁘지 않은거 같은데  유자광의 시를 떼어버리라고 한건  정말 크나큰 복선 같습니다.
똥이 더러워서 피했다면 끝까지 피했어야 하는데 결국은 똥을 맞아버린 격이네요.

일제시대 잔재 , 견치

  * 김종직은 지역에 근거를 두고 조선시대 유교문화를 이끈 유학자들인 재지사림 주도로 성리학적 정치질서를 확립하려 했던 사림파의 대스승이다. 세조의 즉위를 비판하여 지은 <조의제문>이 무오사화를 불러일으켰다.
1459년(세조 5년) 문과에 급제해 벼슬을 시작했고, 세조~성종 연간에 동료, 후배 사림파들을 적극 발탁하여 사림파의 정계 진출 기반을 다져놓았다. 사림파가 형성되면서 훈구파와 대립하기 시작했으며, 제자들과 지방자치조직인 유향소를 다시 세워 향촌사회에 성리학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했다. 

그는 생전에 항우가 초나라 회왕을 죽인 것을 빗대어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것을 비판하는 <조의제문>을 지어 기록으로 남겼는데, 사후인 1498년에 사관으로 있던 제자 김일손이 이를 사초에 수록하여 무오사화의 원인이 되었다. 그는 부관참시를 당하고 숱한 선비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




이은대를 지나 김종직 선생 관영차밭으로 갔습니다.

너른 들판이 보이는 아주 멋진곳이었습니다.






정자에서 점심도시락을 먹었는데 경치도 좋고 공기도 좋아 밥맛이 꿀맛이었습니다.

정자를 나서는데 근처 아주머니께서 뭐라고 하시네요.

" 차 번호 적어놨으니까 쓰레기 잘 치우소 ~ "

아줌마 카리스마가 장난아니었습니다.

역시 김종직이 있던 곳이라 그런지 강직한 카리스마가 뿜어나오는 걸 느꼈습니다.




강직한 김종직이지만 차밭을 조성하는 등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은 컸나 봅니다.






김종직을 좇아 함양여행을 하다보니 너무 강하면 부러진다. 원수를 사랑하라. 

사람을 잘 다스려라, 융통성. 이런 말이 떠오르는 군요.

함양에서 잊고 있던 조선시대 역사공부를 다시 꺼내보는 계기가 되었네요.

함양 학사루,이은대에서 조선초기 성리학자 김종직에 대해 공부해 보세요~

국사가 저절로 재밌어질거에요.



함앙 학사루 : 경남 함양군 함양읍 운림리 31-15 (경남 함양군 함양읍 학사루길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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