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경상남도

[창녕가볼만한곳] 문화재 모음 공원 창녕 만옥정공원

커피믹스 2016. 10. 6.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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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 창녕에는 만옥정(만옥정공원)이라는 공원이 있다.

창녕공원이라고도 불리는 작은 공원이다. 면적 1만 제곱미터의 작은 공원이지만 지정문화재와 봄철의 벚꽃 장관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약 250년 전에 만옥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당시에는 봄마다 명창대회와 그네뛰기대회가 열렸다고 전해진다. 화왕산으로 가는 등산로가 옆으로 나 있다.



만옥정공원은 큰나무가 심어져 있고 그 나무아래 쉴곳이 마련되어 있는 공원이다.

만옥정공원은 색다른 특징이 있는데 여러가지 문화재가 많이 모여있는 공원이다.

역사책에서 배운 것들을 실제로 더듬어 볼 수 있는 역사공원이다.



문화재를 하나하나 살펴보면


1. 창녕지구 전승비( UN전적비)

한국전쟁 중 1950년 8월 7일 함양과 거창을 점령한  북한군은 이 곳 창녕과 현풍을 탈취한 후 대구를 포위 공격하려는 계획으로 낙동강 돌출부인 남지읍 박진나루,오항나루 유어면 부곡리를 건너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계속적인 공격을 가하여 왔으나 미군 제24사단 및 제2사단의 치열한 역습으로 적의 기도를 좌절시켰다. 특히 8월 13일 6회에 걸친 적의 발악적인 공격을 저지하고 9월15일까지 일진일퇴의 혈투를 한달이상 계속하여 북한군 3개 사단의 큰 병력을 섬멸하였다.

조국수호의 마지막 보루였던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고 UN군의 인천상륙작전과 아군의 총반격으로 북진의 기틀을 마련한 이 불후의 공훈을 길이 빛내는 동시에 그 영령을 위로하고자 1959년 3월 31일 건립하였다.







2. 창녕 신라 진흥왕 쳑경비 

: 이 비는 신라 진흥왕 540~576 이 세운 기념비이다. 흔히 순수비로 통칭되나 북한산 ,황초령,마운령에 있는 순수비처럼 순수관경이란 말이 없고 다만 왕이 새 점령지를 다스리는 내용과 이에 관련된 사람들을 열거했으므로 따로 척경비라 일컫는다. 단양 적성의 진흥왕비와 비의 성격이나 형태가 거의 비슷하다. 비문 첫머리의 ' 신사년 2월 1일 입' 은 진흥왕 22년(561) 로 추정되어 기존 3개 순수비보다 수년 앞서 건립했음을 알 수 있다. 매끄러운 화강암의 자연 판석을 약간 다듬어 비문을 새겼으며 개석이 없고 인명과 관등의 표기방식이 독특하며 예스럽고 소박한 해서체를 지닌다.전문 642자 가운데 400자 정도가 판독되었다. 앞부분은 마멸이 심하고 뒷부분은 관련 인물이 나열되어 있다.모두 27행인데 대개 한줄에 26자씩 적었고 마지막 줄은 3자이다.돌의 크기는 높이 178CM,폭 175CM,두께 약 30 CM이다.본래 창녕읍 말흘리 85-4 번지의 대지에 위치해 있었던 것으로 1914년 발견되어 1924년 지금의 자리에 옮겨졌다. 현재 비가 발견되었던 자리에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3. 창녕 척화비 : 

척화비는 흥선대원군이 1866년 (고종3) 에 일어난 병인양요에서 프랑스군을 1871년(고종8) 신미양요에서 미군을 물리치면서 외국과의 화친을 경고하기 위해 1871년 4월 전국 각지에 세운 비석이다. 땅위로 드러난 얇은 받침돌 위에 사각형의 비신을 올린 형태이다. 비의 앞면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음은 곧 화친을 하자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일이다' 라는 내용이 큰 글씨로 '만년에 걸치 자손들에게 경계하노니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 라는 내용이 작은 글씨로 새겨져 있다. 원래 창녕읍 교하리에 있던 것을 광복 후 만옥정공원으로 옮겨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잔디와 돌담이 편안하기도 하고 옛스럽다.



4. 퇴천 삼층석탑 : 

이 삼층석탑은 원래 창녕읍 퇴천리의 한 민가에 무너져 있던 것을 1969년 10월에 해체,수리하여 지금의 위치로 옯겨 왔다. 원래 탑이 있던 곳에서는 기와와 자기 조각 등이 많이 출토되어 큰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사찰의 내력이나 이름을 알려주는 유물이나 기록들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삼층석탑 양식으로 이중의 받침대 위에 삼층의 몸돌을 올렸다.아래 받침돌의 네면에는 각각 2개씩의 모서리 기둥과 가운데의 받침 기둥을 두었으며 위 받침돌의 네 면에는 2개의 모서리 기둥과 하나의 받침 기둥을 두어 목조 건축의 양식을 계승하였다. 각각의 몸돌에는 모서리 기둥을 조각하였으며 지붕틀을 받치는 받침들은 체감률에 따라 4단으로 처리하였다. 지붕들은 처마의 아래 선이 수평을 이루고 있고 각 모서리 부분이 살짝 위로 치켜 올려져 있다. 꼭대기 부분은 모두 유실되았다. 이 석탑은 형식이나 제작수법 그리고 각부분간의 비례등으로 미루어 통일신라말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부분적으로 파손되었으나 시대상을 잘 반영하고 있는 우수한 탑으로 신라석탑 변천과정을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5. 창녕 객사 : 

객사는 중앙에서 파견된 관원이나 외국 사신이 묵는 숙소이자 임금과 대궐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는  곳으로 관아의 부속건물중 하나이다. 이 객사는 창녕현 관아의 부속건물로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300~400년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24년 시장을 세운다는 구실로 창녕읍 술정리로 옯겨졌으며 이후 1988년에 이곳으로 이전하여 보존되고 있다.객사의 전형적인 건물배치는 종묘의 건물을 모델로 하였기 때문에 가운데에 주 건물이 있고 좌우에 익사가 잇는 구조이다.주 건물로 쓰였을 것으로 보이는 이 건물에는 벽체나 창호도 없이 기둥과 지붕만이 남아있고 좌우의 익사도 없어 원래 형태를 알 수 가 없다. 더구나 지붕도 일반적인 객사에 비해 매우 낮고 건물의 방위조차 원형과 달라 권위 있던 객사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 외 창녕 현감 선정비들이 모여있다.


만옥정공원은 문화재 모음 공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 같다.

만옥정공원에 오니 학창시절 역사시간에 배웠던 단어들이 되새겨진다.

그때는 역사공부가 재미없었는데 실제 문화재를 보고 나니 역사에 관심이 더 가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