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경상남도

역사공부 제대로 하게 하는 양산시립박물관

커피믹스 2014. 9. 15.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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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산 북정동 고분군 옆에 2013년 4월에 개관한 양산시립박물관에 가보았다.

몇년전 고분만 있었는데 지금은 박물관이 생겨 역사공부도 하고 좋았다. 

관련글 ; http://decemberrose71.tistory.com/328





양산시립박물관은  총 3개 역사실,고분실,어린이 역사체험실로 나뉘어진다.

기획전시와 야외전시도 이루어지고 있다.





역사실은 선사시대부터 양산역사를 대표하는 유물과 인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의 역사의 시작은 선사시대부터니까 어디든 흔적은 남아 있기마련이다.



전시를 보다가 눈에 띄는게 있었는데 양산 유산동 출토 반가사유상이다.

오랜 세월로 코의 형체가 없어져도 전체적으로 형상이 남아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반가사유상 ; 왼쪽 다리를 내리고 그 무릎 위에 오른쪽 다리를 얹은 일종의 반가부좌의 자세로 대좌위에 걸터앉아

 오른팔의 팔꿈치로 무릎을 짚고 그 손가락으로 오른 뺨을 고이며 생각하는 자세의 보살상을 말한다.원래는 부처가

 태자였을때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출가하여 중생구제라는 큰 뜻을 품고 고뇌하상는 태자사유상에서 유래한것이다.

인도에서는 간다라와 마투라에서 3세기경 불조상의 양 협시 형식에서 출발하여 단독상으로 변한것으로 추측된다.

신라시대에는 화랑제도와 미륵신앙을 연결시켜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라고 불렀다.

특히 삼국시대인 6세기 후반부터 유행하기 시작하여 통일신라 초기까지 금동 또는 석조로 많이 만들어졌는데 대표적인

 예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국보 제 78호 및 국보 83호의 <금동반가사유상>, 경북봉화 출토 <석조반가사유상>

(경북대 박물관 소장)등이 있다.반가사유상은 일본의 아스카,하쿠호 시대에도 많이 만들어졌으며 특히 고류지에 있는 

<목조반가사유상>은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과 형태도 비슷하고 적송으로 만들어진 점,당시 삼국과 일본과의

 교류관계를 통해서 볼때 한국의 상으로 추정된다.



양산 출신의 조선시대 의병장 이겸수 선생의 보검이다.남장서원 소장.

 학성이씨의 시조 이예는 일본과의 외교관계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고 화통완구등 병기제작에도 공적이 컷는데 1443년(세종25) 대마도주와 계해약조를 체결한 공으로 공패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피로인(적에게 사로잡힌 사람)은 물론 명나라의 피로인을 데리고 오는 일에도 힘써 명에서도 공패를 받았다.

이예의 손자 이직강이 처음 양산 서면에 살았고 그 후손이 양산시 주남동 및 각지에 살고 있다.이종실의 5세손 이겸수는 조선시대 의병장으로 사명대사와 함께 왜적의 적진으로 파견되어 강화회담을 안내하고 협상을 유리하게 이끄는데 공을 세웠다.







전라남도 장성출신인 조영규는 조선 중기 무신으로서 그 성품에 탐욕이 없고 절개가 있어 이름이 드높았다.

양산군수로 재임하던 1592년에 동래부사 송상현과 함께 동래성에서 왜군의 침입에 대항하여 싸우다 순절하였다.

이에 1669년 조송준길이 조정에 조영규의 공을 아뢰서 호조참판의 벼슬이 내려졌고 충신으로 봉해져 장성에 붉은

 문을 세워 그 공을 기리는 정려각이 있다.



조선시대 삼강행실도 .조선 세종때 엮어진 도덕서 목판본으로 3권 1책이다.



양산지방의 토지대장이다.토지소유자 난에 기재되어 있는 직역등으로 미루어 17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

먼저 자호,연번호,전의 등급,제답,직전등 토지의 형상,면적,동서남북의 길이,척수,소출,면적을 표시하느 육부구속등을 

표기하였고 지형의 모습 인접한 땅주인의 이름등의 순서로 되어있다.이러한 순은 전국적으로 동일하며 조선시대의 

농촌경제사 측면에서 토지소유에 관한 문제 전답의 형태와 비율 농민의 경작면젹 소득관계등의 윤곽을 파악할 수 있는 

객관적인 사료로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띤다.



위대한 독립투사 우산 윤현진 ( 사진에서 뒷줄 왼쪽에서 2번째)

1892년에 경남 양산군 소토리에서 태어난 윤현진은 양산에 의춘학원을 설립하여 인재양성 힘썻으며 의춘양행을 설립해

 우리나라 최초로 소비조합은동을 전개하여 일제상품을 배척했다.또한 안희제와 백산상회를 설립 독립운동의 연락과

 자금조달의역할을 맡았다.1962년 정부는 국민훈장을 수여했다.1921년에 병환으로 30세 나이로 일생을 마감했다.



이원수 : 어려서 양산을 떠난 이원수 선생에게 양산은 마음의 고향이었다.1911년 양산에서 태어나 이듬해 창원을거쳐 

서울에서 만년을 보냈으며 1981년 1월 24일 71세를 일기로 작고하였다.홍난파가 곡을 붙여 오늘날 국민가요로 자리잡은 

고향의 봄은 1926년 이원수 선생이 어린이 지에 투고하여 당선되었던 글이다."오빠생각"의 작사가 최순애 여사와의 결혼도

 이 잡지를계기로 이루어졋다.이렇게 시작한 본격적인 문학가의 길에서 바라본 피폐한 농촌 아이들의 모습은 가슴아픈

 '고향'의 현실이었으며 곧바로 시의 주제가 되었다.불안정한 시국하에 고민하던 문학청년 이원수는 동시와 소설을 통해 

그러한 것들을 드러내고 해방후에도 그의 작품세계에 그대로 드러난다.





이원수 선생 작품



훈장







교첩 



교첩 ; 병조에서 이몽란을 효력부위 수문장에 임명하는 교지이다.효력부위는 정9품 무관에게 내리는 벼슬이다.





과거시험 답안지 : 안효필의 시권이다.시권이란 초시부터 대과에 이르는 과거시험답안지를 말한다.고시관이나 채점자가

 붉은 글씨로 중요한 부분을 점검하고 차상,차하,의 평가순위를 적어놓는다.이것은 초시 즉 진사시험의 답안지이며 56명중

 3등으로 차상을 받은것이다.





부부총의 고고학적 의의 : 부부총이 위치한 북정동 고분군은 입지적인 면에서는 가야의 무덤형식을 형태적면에서는 신라의 무덤형식을 따르고 있다.또한 출토품들은 경주지역과 많은 유사성을 가지면서도 무덤형태가 고유의 전통성을 띠고 있어 피장자는 신라의 귀족이나 신라왕조에 흡수된 호족 고관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지금까지 무덤의 주인에 대하여는 여러 설이 있으나 김유신의 아버지로 금관가야 출신이면서 신라의 진골귀족이었던 김서현과 만명부인의 무덤이라는 설이 있다.

부부총과 고분에서 발견된 출토유물은 우리나라 역사상 국가와 지역에 따른 성격형성과 특수성 기여라는 면에서 가장 주목된다.현재 부부총유물은 도쿄국립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부부총은 굴식돌방무덤 형태이다. 순장풍습을 엿볼수 있다.



부부총 출토유물들이다.










금조총에서 출토한 금제새다리 이다.



금조총은 






금조총은 1990년 부부총을 재조사하던 과정중에 발굴된 고분으로 출토된 유물중 금제조족공예품이 특징적이다. 금조총의 축조시기는 인접한 부부총의 축조시기와 동일한 시기인 5세기 후반이나 조금 늦은 6세기 전반으로 추측된다. 





현재 양산시립박물관이 위치한곳으로 5-6세기에 해당하는 25기의 고분과 1000여점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다.그 중에서

 13호분은 앞트기식돌방무덤은 비교적 유구가 잘 남아있고 규모도 큰 편에 속한다.






어린이 역사체험실이다.

아이들이 재미난 놀이를 통해 역사를 배워보는 곳이다.







이렇게 양산시립박물관을 모두다 돌아보았다.

양산의 역사와 한국의 역사가 알차게 들어있는 곳이었다.



출처 : 양산시립박물관 홈페이지


양산시립박물관 : http://museum.yangsan.go.kr/index.jsp

경남 양산시 북정로 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