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경상남도

대비되는 아버지 상 , 영조와 사도세자 , 왕욱과 고려 현종

커피믹스 2015. 9. 24.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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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아인,송강호의 사도가 요즘 대세다.

누적관객수 180만으로 1위를 달리고 있다.

영화 사도는 우리가 아는 사도세자의 임오화변을 그대로 가져간다.

왕과 왕의 아들로 만나 아들을 죽게  만들수 밖에 없었던 아버지 영조(조선시대)와 사도세자의 슬픈 사연은 눈물이 나지

않을 수 없다.


이렇듯 왕의 자리라는 게 지켜야 할 것도 많고 신하와 얽히고 설키고 집안과 얽히고 설키고 쉽지 않은 자리인거 같다.


고려시대에도 왕족의 아비와 아들의 애잔한 야사가 전해온다.

아비와 아들이 같이 살지 못하고 그리워 하다 죽은 아비의 이야기가 있다.

바로 고려 태조 왕건 8번째 아들 왕욱과 그의 아들 현종(고려 8대임금)의 이야기이다.


지도의 배방사지, 고자실(학촌마을),고자정을 둘러본다.


왕욱은 고려 5대왕 경종 왕비 황보 와 이웃에 있었는데 경종과 사별하자 황보는 이복 숙부인 왕욱과 사랑에 빠져 아들(현종)을 낳았다. 조카와 사랑에 빠진 왕욱을 가만히 두었을까?어미는 아들을 낳은 후 숨을 거두고 고려 성종은 왕욱을 사수현(지금의 사천 사남면, 성황당산 아래) 으로 귀양보냈다.


고려는 왕권강화를 위해 왕족사이의 결혼(근친혼)을 시켰다.이러한 근친혼은 8대 현종까지 이어졌다가 고려중엽 유학의 영향으로 근친혈족 간의 혼인이 규제되기 시작해 고려말에는 왕실내의 근친혼풍습이 사라졌다.


이 야사를 듣고 이야기 탐방대 누군가가 조카와 사랑한 왕욱과 황보중 누가 유죄인가?를 물었다.

이야기 탐방대에 참여한 블로거,작가,6명중 3명은 둘다 무죄라고 2명은 왕욱이 유죄,1명은 황보가 유죄라고 했다.

이렇게 사랑에 대한 시각이 제각각이라는 사실은 흥미로웠다.

아마 옛날에도 사랑에 대한 답은 아마 없었으리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배방사지 근처~ 숲속 인적없는 오지이다.



현종은 보모 손에 키워졌는데 6대 임금 성종이 아이를 찾았는데 두 살이던 아이는 성종을 아버지 라고 계속 불렀다.성종은 아이가 아버지를 너무나도 그리워하는 게 안타까워 아이를 아버지가 있는 사천땅으로 보내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아버지와 함께 살지는 못하게 하였다. 아이는 지금의 정동면 장산리 대산마을 뱅잇골 배방사에 거주하게 했다.

왕욱은 사남면에서 정동면 배방사까지 찾아가 아들 순을 보는 즐거움으로 살았는데 해가 저물면 다시 귀양지로 돌아오면서 아들 사는 배방사를 돌아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때 눈물을 흘리던 지금의 정동면 학촌리 고개를 고자봉(아들을 되돌아본다.) 라 하고 이 마을을 고자실이라 불렀다.


아들이 가까이 있지만 같이 살 수 없었던 아버지는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유아때의 아들의 재롱을 아버지는 아주 많이 보고 싶었을것이다.

그래도 한번씩 볼 수 있었다는 것은 어쩌면 유배생활의 한가지 낙이었는지도 모른다.






고자실 학촌마을 풍경이 평화롭고 아름답다.






고자실(학촌마을)의 포구나무,


고자정으로 가는 길에 만난 노란벼의 향연이 아름답다





고자치로 가는 길에 만난 밤송이도 너무 풋풋하다.



2015년 사천시는 고려 8대임금 현종 배방사지 터와 고자실 길을 복원하고 있다.

이름하여 고려현종 부자 상봉길이다.






왕욱은 귀양온지 4년만에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아들(당시6살)에게 금 한주머니를 주면서 '내가 죽거든 이 금을 지관에게 주고 나를 이 고을 성황당 남녘귀룡동(지금 사남면 능화마을 뒷산)에 매장하고 받드시 엎어서 묻게 하라' 하였다.왕욱은 풍수와 지리에 능했었는데 묘자리가 풍수적으로 임금이 날 자리라서 시체를 엎어 묻으면 더 빨리 임금이 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사주를 왕의 고향이란 풍패지향이라 불렀는데 조선시대 전주와 고려시대 사주 두 군데 밖에 없다.




고자정, 아버지가 아들을 그리워하며 넘었다는 고개(고자치)에 있는 고자정이다.




1009년 왕욱의 아들 ,고려 8대임금 현종이 왕위에 오른다.

천추태후는7대임금인 목종의 친어머니이자 현종의 이모이다.현종은 아버지 왕욱을 효목대왕이라 높이고 묘호를 안종이라하고 어머니를 효숙태후로 추존하였다.8년뒤(1017년) 능화마을의 시신을 경기도 건릉으로 옮겼는데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현종은 어린시절을 보낸 사천땅을 은혜를 베푼 땅이라 하여 많은 특혜를 베풀었다.진주목에 속해 있던 작은 고을인 사수현을 사주로 승격시켰다.그 당시 전국에는 12개주만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특혜라 할수 있다. '고려사절요'의 기록에 의하면 현종6년 (1015년)이다.


2015년 사천시는 사주로 승격된 1000년을 기념하여 고려 8대 임금 현종의 배방사 사지 터 와 고자실 길을 복원하고 있다.



고자정에서 선황사 이정표를 따라 가본다.




선황사 옆에 성황당산성이 복원되었는데 , 사천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왕욱이 간 길을 차로 이동해 보니 걸어가기에는 몇시간이나 걸린 꽤나 먼 거리인데 아들을 보기위해 고개를 넘고 했다니

 아버지의 아들 사랑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와 아들관계는 돈독하기도 하고 부딪치기도 한다.다 잘 되라고 하는 채찍질인데 때론 커뮤니티가 힘들때도 있다.

부모의 사랑은 이렇게 내리사랑에다 크다는것! 자식을 낳아보니 더욱 느껴져서 고려현종의 야사가 그냥 흘려지지 않았다.

경남 사천에 이런 옛이야기길이 있다는게 반갑기도 하고 재밌는 길이었다.

아이들에게 이런 야사를 들려주면서 고려 역사를 들려주면 역사 공부가 저절로 될 것이다. 



덧붙임 > 이구산에서 흥무산까지 트레킹 코스가 있으니 등산 좋아하는 이들은 트레킹을 해도 좋겠다.



*경남도민일보 해딴에가 주최하는 이야기 탐방대 다녀와서 적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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